성경 함께 읽기 : 통독 가이드/요한복음 함께 읽기 : 통독 가이드

요한복음 서론 & 1장 함께 읽기

The Reformed 2025. 9. 7. 00:33

요한복음 서론을 안내하기에 앞서, 왜 요한복음을 읽어야 하는가?를 함께 이야기해고자 합니다.

 

성경을 일정한 순서대로 통독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성경을 처음 읽거나, 오랫만에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먼저 읽는 것이 매우 탁월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행적, 비유, 가르침을 연대기적 관점에서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에 집중한다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며 그분의 신성(神性)과 정체성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 기록 목적이 명확히 적혀 있는데,

 

[요한복음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입니다. 요한은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해 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② 그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용을 선택하고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처음 읽는 이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적합한 안내서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서론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다른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라고 묶고, 요한복음은 별도로 봅니다. 공관복음서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비슷한 관점과 구조로 공유하며 ‘함께 보는’ 관점을 제공한다면, 요한복음은 저자 요한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심층적으로 증언하는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은 그 내용과 구조에서도 차이점을 보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건 중 상당수가 요한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 전체의 90%에 달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탄생이나 사역의 시작에서 출발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의 영역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창세 전 영원부터 시작되어 인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풀어냅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1-5절

(성경책을 옆에 두고, 먼저 성경을 읽고 내용을 읽어주세요)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태초에... 계시니라": 요한은 의도적으로 창세기 1장 1절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계속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미완료 시제입니다. 즉,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말씀'은 이미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 아니라는 주장에 맞서 그분의 영원한 선재성(先在性)을 확립합니다.  
  • "...하나님과 함께": 이 전치사는 단순한 근접성을 넘어, 친밀한 교제와 사귐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는 신격(Godhead) 내에 위격의 구별이 있음을 시사하며,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가 되는 진리입니다.
  •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동등한 신성에 대한 명백한 선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을 공유하십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구원자만이 죄에 대한 무한한 속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절에서 로고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당시 헬라 철학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필자는 생각을 달리하여,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안에서 충분히 그 단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충분성을 믿습니다.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구절은 1절의 진리를 강조적으로 반복하고 강화하며, 그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의 신적 행위자이십니다. 이는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확립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삶의 모든 영역의 왕이심을 믿는 개혁주의 세계관의 초석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다면,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생명의 창조되지 않은 근원이십니다. 이 생명은 영적으로 죽어 어둠 속에 있는 인류에게 참된 영적 조명을 주는 유일한 원천("빛")입니다.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은 죄와 무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특징지어지는 타락한 세상 체제를 상징합니다. '깨닫지 못하더라'는 '붙잡다', '이해하다', 또는 '이기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해할 수도, 이길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영적 전쟁의 주제를 소개하며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시켜 줍니다.

 

이 1-5절은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핵심 교리를 직접적으로 반박하며, 전적 타락 교리의 기초를 세웁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만물의 영원하고 주권적인 창조주로 확립합니다. 또한 그분을 생명과 빛의 유일한 근원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를 떠나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정의상 어둠 속에 있으며 참된 생명이 없습니다. 이는 나중에 나올 10절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는 진술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세상의 무지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주이자 유지자에 대한 책임 있는 반역입니다. 이처럼 서두의 높은 기독론은 인간의 죄된 상태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전적 타락)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우리의 타락이 창조주 로고스와의 관계 단절로 정의됨을 보여줍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6-13절

 

6-8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이야기는 영원에서 시간으로, 신적인 말씀에서 인간 증인으로 전환됩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즉시 정의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지만" 빛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목적은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참된 사역의 패러다임을 설정합니다. 사역은 파생적이고 부차적이며, 항상 자신을 떠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형태의 계시가 그림자에 불과했던 '참된' 또는 궁극적인 빛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비춘다"는 구절은 보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의 빛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그분의 일반 계시와 양심의 증거가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에 위대한 비극과 인간 타락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성경적 진술이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오셨으나, 피조물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자기 백성")은 약속된 메시아를 적극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이 거절은 하나님의 계획의 실패가 아니라, 인류의 영적 무지와 반역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구절은 극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영접과 믿음은 인간 편의 도구이지만, 능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주권적 은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진술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새로운 출생에 대한 모든 가능한 인간적 원인을 체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자연적 혈통("혈통으로나"), 인간의 욕망("육정으로나"), 인간의 주도권("사람의 뜻으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이 구절은 불가항력적 은혜와 무조건적 선택 교리의 서사적 표현입니다.  

11절에서 13절로의 논리적 흐름은 개혁주의 구원 이해(구원의 서정)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11절은 보편적인 문제, 즉 죄로 인한 보편적 거절(전적 타락)을 확립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12절은 구원의 결과, 즉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13절은 그 믿음과 영접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모두가 그를 거절한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그 답은 믿는 자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출생을 일으키십니다. 이러한 순서—문제(타락), 해결책(하나님에 의한 중생), 증거(믿음/영접)—는 개혁주의 은혜 교리(칼빈의 TULIP)와 완벽하게 일치하며 , 이 교리들이 성경에 억지로 덧씌워진 추상적 체계가 아니라,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성경 자체의 설명임을 보여줍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14-18절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것이 서언부의 절정인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거하시매'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쳤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했던 구약의 성막을 떠올리게 하는 심오한 언약적 암시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만남의 장소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제자들은 불기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묘사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charis)와 '진리'(alētheia)는 핵심적인 언약 용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hesed 와 'emet)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적 신실하심의 완벽한 구현이자 성취이십니다.  

 

15절: 요한이... 증언하여 이르되...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요한의 증언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확증하며 1절의 주제를 강화합니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공급으로부터 모든 영적 축복을 받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는 하나님의 호의가 계속적이고, 풍성하며, 고갈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는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에 대한 선언입니다. 인간 중보자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을 드러내고 구원자의 필요성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언약적 신실하심("은혜와 진리")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실현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의 핵심입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계시는 그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곧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타내셨느니라'(exēgēsato)는 '주해(exegesis)'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주해이십니다.  

 

성육신(14절)은 '체험적' 또는 '실천적' 신성을 강조하는 청교도 신학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 들어오셔서 관계와 교제를 가능하게 하신 인격이십니다. 역사의 중심 사건은 초월적인 말씀이 내재적인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신학이 신자의 마음과 가정, 일터에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성육신 교리는 이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신비로운 사색을 통해 멀리 계신 신에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에 교리를 적용하라는 청교도의 부르심 은 요한복음 1장 14절의 진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신앙 또한 우리의 일상 존재 속에서 '육신화'되어야 합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19-28절

 

19-21절: "네가 누구냐"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요한을 심문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당시의 메시아적 기대(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를 드러냅니다. 요한의 대답은 단호한 부정의 연속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아니라... 아니라".  

 

22-23절: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라는 요구에, 요한은 자신의 성취나 감정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전적으로 성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의 중요성은 오직 오실 왕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에서 비롯됩니다.  

 

24-27절: "네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바리새인들은 그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요한의 대답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주의를 돌립니다. 그는 준비를 위한 물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너무나 무한히 우월하시기에 요한 자신은 그분을 위해 가장 비천한 종의 일("그의 신발끈을 풀기도")조차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여깁니다.  

 

28절: 사건의 장소가 명시되어 역사적 사실임을 확증합니다.

 

세례 요한의 자기 부정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신학적 원리가 실제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종교개혁과 청교도 신앙의 핵심 신조 중 하나는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하며, 인간에게는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위해 명예와 칭호를 주장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맞았지만 , 체계적으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최상권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정의했습니다("소리", "자격 없는 자"). 그의 삶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단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핵심적인 개혁주의 원리를 구현한 인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참된 영적 위대함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29-34절

 

29절: "이튿날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 칭호는 구약적 배경이 풍부하며, 그 피가 심판에서 구원했던 유월절 어린 양(출 12장), 매일 드려지던 성전의 제물, 그리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았던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연상시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완전한 대속 제물이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는 속죄의 효력과 범위를 말합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세상'은 예외 없이 모든 개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로부터 택함 받은 자들의 세상(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을 가리킵니다. 이는 구약 제사의 배타적인 국가적 범위와 대조됩니다. 속죄는 단지 가능성이 아니라 성취입니다. 그는 죄를  지고 가십니다. 이는 제한 속죄 또는 특정 속죄 교리를 가리킵니다.

 

30-34절: 요한은 자신의 증언을 반복하며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 목적이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았다는 궁극적인 목격 증언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표적을 성취한 것입니다. 이 근거 위에서 그는 최종적이고 절정에 달하는 선언을 합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지목한 것은 복음서 전체의 서사를 개혁주의의 대속적 속죄 교리 안에서 즉시 틀 짓습니다.

서언부에서 확인된 중심 문제는 창조주를 거부하는 세상으로 나타난 죄였습니다(10-11절). 중심 해결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출생이었습니다(13절). 이제 세례 요한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성취하시는 메커니즘을 드러냅니다. 바로 대속 제물의 희생적 죽음입니다. 이는 구원이 단순히 도덕적 모범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법적 거래라는 개혁주의의 강조점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이 선언을 이토록 초반에 배치함으로써, 사도 요한은 독자들에게 이어지는 모든 사건—모든 기적, 모든 가르침, 그리고 특히 십자가 사건—을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하도록 지시합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35-42절

 

35-39절: 세례 요한이 다시 예수를 가리키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제자 두 사람이 듣고 즉시 예수를 따릅니다. 그들의 첫 대화는 간단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주권적인 초대입니다. "와서 보라." 이것은 단순한 제안 이상으로, 그들을 자신과의 교제 속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40-42절: 두 사람 중 하나는 안드레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첫 행동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시몬을 예수께 데려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보시고, 신적 지식과 권위를 보이시며 그를 게바(베드로)라고 다시 이름 지어주십니다. 이 개명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명령에 의해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을 의미합니다.

 

 

읽기: 요한복음 1장 43-51절

 

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표현은 순전한 신적 주도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불가항력적 부르심의 본질입니다.

 

44-46절: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분을 찾았다고 선언합니다. 나다나엘의 회의적인 반응,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인간의 편견과 영적 무지를 반영합니다. 빌립의 지혜로운 대답은 예수님의 초대와 같습니다. "와서 보라."

 

47-49절: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의 성품을 아심을 드러내시며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자신을 아시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신적 전지(全知)의 표적은 나다나엘의 회의론을 깨뜨리고, 그로 하여금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심오한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50-51절: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분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장엄한 비전으로 마무리하십니다. 이는 야곱의 사닥다리(창 28장)를 암시하며,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중보자, 즉 사닥다리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부르심은 무조건적 선택 교리에 대한 완벽한 서사적 예증입니다.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개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그들 안에서 예견된 어떤 장점, 믿음, 또는 자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선하신 뜻에만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야기 속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를 찾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의적이고 편견에 차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부름받을 만한 어떤 장점도 없었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적이고 선제적인 지식과 선택을 드러냅니다. 나다나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택은 그리스도를 향한 나다나엘의 인간적 여정에 앞섰습니다. 나다나엘의 믿음은 예수님의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주권적 선택과 자기 계시가 나다나엘의 믿음의 원인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원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탐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주권적 탐구에서 시작됨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인간의 결단이 아닌 신적 선택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칭호들

말씀(로고스)(1,14), 빛(4-9), 하나님의 어린 양(29,36), 하나님의 아들(34, 49), 메시야(그리스도)(41), 이스라엘의 임금(49), 인자(51)

 

 

나눔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이 나의 직업, 재정, 인간관계에 대한 그분의 권위를 어떻게 새롭게 보게 합니까?
  2.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를 가리키는 것에서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나는 때때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보다 어떤 '칭호'나 정체성의 근원(예: 직함, 가족 내 역할, 개인적 성취)에 더 의존하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묵상하는 것은 나 자신의 죄와 마주할 때 어떻게 확신과 평안을 줍니까?
  4.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앙 여정 가운데 어떤 "더 큰 일"—그분의 영광에 대한 더 깊은 이해, 그분의 백성을 향한 더 큰 사랑, 더 담대한 증언—을 보여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까?